Kay’s book –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by 강신주 / 지승호

안녕하세요, 케이입니다.오늘은 나의#486번째 북 리뷰입니다.철학이란 무엇인가요?철학은 모든 학문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적 고민, 그리고 탐구가 철학에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말하는 경제학, 자연 과학, 그리고 의술도 철학이라는 명제에서 태어난 학문입니다. 특히 경제학은 19세기에 들어가서야 철학에서 파생된 정도로 철학은 인류의 모든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이런 철학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길 안내자가 중요합니다.

바람이 분다, 살지 않으면 저자 강신주, 지승호 출판 EBS BOOKS 출시 2022.03.05.

아직 나에게 철학의 길을 포괄적으로 안내하는 사람은 강 모 상주라는 철학자입니다. 이번 강·신 주는 철학자와 지·순호 인터뷰어가 대담 집을 통해서 철학이 우리의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 적용할지를 좀 더 강경한 목소리로 알리고 있어요.제가 좋아하는 현존의 철학자인 것으로 인용문이 깁니다. 그만큼 그의 생각이 주는 통찰력이 대단하므로, 많이 인용한 것으로, 널리 양해 바랍니다. 손을 놓지 힘든 이유는 절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손을 뗀다는 이유는 그것만 잡고 살면 안 되니,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이 있어, 이것도 저것도 잡을 수 있습니다. 빈손으로 산다는 것을 불교에서 하늘과 하잖아요. 우리가 있는 이유를 비판했다고 이유를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이 자유롭게 잡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철학과 종교의 차이가 나옵니다만, 종교는 끝까지 신뢰를 가지고 가는 것이며 철학은 일정 부분 그 철학자와 함께 가서 헤어져야 합니다. 잠시 동반자라구요. 나도 대중에게 하거든요.(웃음)자신이 성장한 만큼 관심이 바뀌면 다른 철학자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을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P49

강·신 주는 철학자의 책”철학 vs철학”은 약 1800쪽을 자랑합니다. 이 책을 절반 정도 읽고 잠시 동양 철학 쪽은 쉬고 있지만 언젠가 다 읽죠. 그는 수많은 철학자의 사상을 그 책을 통해서 정리하고 우리에게 간단하게 일러 줍니다. 그는 어느 철학자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벼랑에 몰렸을 때, 그 때는 과감하게 손을 놓고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훌륭한 철학을 갖고 보라고 추천합니다. 종교와 철학이 다른 이유는 철학은 신념을 버리고 언제든지 바꾸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술한 “철학 vs철학”을 어느 정도 읽어 보면 느끼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 정말 다양하고, 어떻게 거기에 생각이 미친 것인가라는 경입니다. 스마트 폰과 SNS가 담론을 지배하고 있어서 나 같은 인문 주의자들은 이슈가 떠오른다고 발화를 잘하지 못 합니다. 과거에는 여유를 가지고 평가를 내리는 시대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화제가 된 것을 올리고 곧바로 휘발하고 다시 사라지잖아요. 어떤 이슈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조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평가가 단편적인 가능성이 있으므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스마트 폰이 만들어 놓은 나쁜 점의 하나는 올바른 판단, 지속 가능한 판단, 객관적 판단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SNS활동을 안 할 거예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책을 쓰고 강연을 하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당면한 이슈에 대해서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선 선정적인 정보로부터 들어오고 나중에 후회하는 판단을 하기 쉽습니다. 최근 유명한 지식인들이 섣부른 판단으로 곤란하거나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수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평론가는 넘쳐나지만 문제는 입체적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즉각 내뿜고 감정적으로 배설하므로, 몇달 지나면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 나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이 발달하면서 뉴스는 이제 가치 덕목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아닙니까.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 news”은 아니다”올 도스 olds”에 있습니다. 얼마나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며 한 근로자가 숨진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며 언론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미디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재생 수에 의존하는 미디어는 그것이 가능할까요? 미디어가 발달하고 있지 않았을 때 19세기 자본주의적 조건에서는 뉴스가 중요하다, 취재가 핵심이었습니다. 지금은 취재를 합니까?SNS와 보도 자료에서 기사를 쓰잖아요. 그래서 기사 제목도 같고,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그런 것을 얘기해야 합니다. 지금은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 도스의 시대이니까요..P59-60

스마트 폰이 몰고 온 세계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자 강·신 성주는 “그런 세상이 기쁘다뿐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 정보의 소비가 빠르므로, 틀린 판단을 내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보다는 자극적인 정보를 갖고 문제를 수박 겉 핥게 분석하면요. 얼마 전 송·석!사장이 쓴 “장면”에서 그가 제시한 어젠다 키핑에 대해서 극찬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의 주제를 끊임없이 발굴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수 없는 현재의 언론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영원하지 않아서 소중한 겁니다. 죽음에 들어가는 과정을 살것이니까,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불변임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대로 계속 있기에는 무관심합니다. 누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조화로 사시라고 생각합니까. 친구가 병들어 죽어 나갈 때 서둘러서 가고 친구의 손을 잡아 준다고 하잖아요. 그것이 인문학적인 모습입니다. 어차피 죽는 것에 뭐 하러 간다, 나도 언젠가 죽는데, 이러면 영원히 사랑이란 없어요. 일출과 일몰은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니까 가치가 있나요. “절대적”이라고 자인하는 모든 진리는 무가치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잘 카나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너무 인문학적 질문 같고 아주 반 인문학적 질문입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야 어차피 내년에 다시 피는데, 이런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올해 피어난 꽃이 지난해 핀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 내년 피는 꽃이 아닌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계속 존재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소중한 겁니다.)역사적으로 인간은 모든 영원의 것을 만들었습니다. 영혼과 천국을 만들어 극락과 정토를 밝히며 대대로 만대의 제사를 지내잖아요. 육체는 사라져서 불변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죽어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돈과 권력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면서 영원한 것으로 하려 합니다. 돈은 썩지 않고 점점 디지털화되고 있잖아요. 이런 영원에 대한 욕망은 권력적이고 지배적인 이유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를 “영원한 형이상학”,”피의 형이상학”,”돈의 형이상학”라 할 수 있습니다. 무상한 현실 세계는 가치가 없어 영혼과 천국 같은 세계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현재는 미래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습니까. 한다고 억압적인 시간 개념에 지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을 상정하고 집착하는 생각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다 보면 대에 소를 희생하고 혼자의 삶보다 민족의 번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나올 거에요. 지배와 억압적인 사고 속에 연루되는 겁니다. 우리는 변화의 측면에 선다. 우리는 무상 측면에 선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중요하다, 그것을 지키고 주어야 합니다.P68-69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추구한다는 인사이트는 나에게 무언가 마음 속에 돌을 던진 느낌이었습니다. 요즘 제주는 벚꽃이 한창입니다만, 그 꽃을 볼 때마다 좋고, 지금은 활짝 피어서 바람이 조금씩 불면 꽃잎이 춤추는 것도 좋겠어요. 작년에는 몰랐던 감흥이 올해는 더 아름답게 되었는데 왤까 하는 것을 생각 못했어요. 그 이유는 제가 꽃을 보고 즐기는 그 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라고는 그의 말에 ” 그렇구나!!”라는 마음 속 외침으로 답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밤을 즐기고 싶습니다···상=테그쥬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s, 1939)을 보면”사랑은 마주 보는 게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란 말이 있지만 과연 그런가요? 사랑은 마주 보는 것입니다. 같은 종교를 갖고 있어 같은 취항을 갖고 있다고 사랑을 돈독히 하나요? 여행에 가서 바다를 함께 보면 깊은 됩니까?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죽을 때까지 마주 보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관계가 딱딱해지는 것으로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온 가족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텔레비전이 고장 나면 각각의 방에 흩어지나요. 그렇게 살아 있는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서로 말하고 산책하고 당신과 내가 마주 보는 관계가 사랑의 관계잖아요.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 텔레비전을 보는 저희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공통의 방향이라는 것이 사라지자 금방 망가져서 산란합니다.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관계입니다. 공통의 방향 공통의 이해에서 유지되는 관계는 사랑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공통의 방향이 없어졌을 때 흔들리는 관계가 어떻게 사랑일까요? 그래서 공통의 관심사를 통한 만남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나요. 이 점에서 인터넷의 만남은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에서 결혼 중개업자를 매개로 사람을 만나잖아요. 연봉이 얼마이고, 대학은 어디로 나가고 키가 몇개에 조건을 맞추어 보잖아요. 그렇게 만나서도 건강합니다. 왜냐하면 취직하는 것과 비슷해서. 일종의 거래 관계니까 한쪽이 경제적으로 붕괴하지 않는 한 유지됩니다. 마치 직장 생활처럼 “우리는 잘 지냅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직업이 되어 버립니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들어옵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주는 것이 없으면 더 이상 관계 조성을 할 필요 없이 해고 통보하면 됩니다. 내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관계를 끊자, 그런 관계에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P102-104

사랑은 같은 장소를 바라보는 것으로 알려졌을 때 별다른 비판도 없을 것이냐? 말이 멋있었어”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런 그 한마디로 강·신 주는 철학자는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가져온 계약 관계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강·신 주는 철학자는 좀 과감히 비판하는 편입니다. 얼마 전 다른 인터뷰에서 “힐링”을 마치 의사가 수술하며 배를 연것에 도저히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배를 다시 닫는 것과 다름 없는, 그냥 임시 방편의 심리 치료법이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때도 아차 싶었지만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지·승호:2016년 이·세도루와 알 바둑의 대결이 인류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바둑 같은 게임은 인공 지능이 당분간 힘들다고 예상하고 이·세도루 기사도 인터뷰에서 자신이 질것이라는 생각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싸우고 보면 알파 바둑이 이겼습니다.강·신 주었다:인간이 기계로 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바둑에 졌을 뿐입니다. 연애로 진 것도 아니고 산책에서 진 셈도 아닙니다. 알파 바둑은 연애도 산책도 농담도 웃기잖아요. 단지 바둑을 두다 뿐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기계처럼 부품화하고 분업화하고 전문가로 했잖아요. 전문가의 논리에서는 기계에 대해서 안 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알파 바둑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모델과 같습니다. 정확히 계산해서 빨리 처리하고… 그렇긴……. 바둑에 질 것 같으면 고민하지 않고, 판을 쓸면 됩니다. 알파 바둑은 못할 거예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면서 판을 뒤집는 것이군요.(웃음)왜 알파 바둑에 지은 것이 화제가 되는지 아십니까?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계 정도 합리적이고 신속하고 정확하지 않구나 결국 기계만 전문가가 되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전문가가 될 수 없어 결국 기계가 우리 대신이 될 것이라는 절망감을 갖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문가 안 됩니다. 한 분야만 잘해서 수많은 분야에 미숙하다면 우리는 장애가 됩니다. 컴퓨터만 잘 다루는 다른 것, 예를 들면 음악 감상과 연애, 요리 만들기가 힘든 사람을 생각하고 보세요. 화려함 없는 사람이겠지. 알파 바둑은 바둑 전문가의 극단적인 형태에 불과합니다. 바둑 전문가와 싸우고 있는데 답이 없어요.P134-135이 책의 장점은 강·신 준다는 철학자가 바라보는 세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비트겐슈타인과 니첸다는 철학자의 주장을 듣고도 그것이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나 같은 응용력 없는 사람은 과연 철학이 왜 삶에서 중요하고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느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좋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알파 바둑에 바둑에서 한번 졌다고 해서 세계가 시끄러울 일은 없을까? 다만, 바둑이라는 놀러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 아니냐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속지 말라는 일갈입니다.지·승호: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교육은 무엇입니까?강·신 주었다:”철학적으로 말해서 좋은 교육”은 모순되는 표현입니다. 교육은 나쁜 짓입니다. 기성 세대인 억압 체제이고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니까요. 교육이 아이들을 가르친다”라는 뜻이라면 교육은 인문 주의자들이 목숨을 걸고 없애야 할 대상이죠. 교육이라는 말을 잃고, 오히려”성장”이란 말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성장을 돕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책과 교재는 다릅니다. 교재, 즉 교과서는 아이들을 졸게 합니다. 반면 그 교과서 밑에 몰래 숨기고 읽는 책은 아니죠. 선생님이나 부모가 읽는 교재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은 이렇게 다릅니다. 앞에서 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주인, 반대로 남의 권위에 밀려서 남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교재는 노예의 문자로 책은 주인의 문자였어요.)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라면,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에 들었어요.물론 그렇다고 아이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고, 노력 없이 주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만으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으니까요. 폭력 수단과 정치 수단을 독점한 만큼 국가는, 그리고 생산 수단을 독점한 채 국가의 비호를 받기 때문에 자본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직접·간접적으로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발견한 아이들은 이미 물 만난 물고기 같습니다. 그래서 나라나 자본이 땅에서 살기를 요구해도 그들은 가능하면 물을 떠나지 못하게 할걸요. 한편으로는 자신을 노예로 삼으려는 경향과 맞서서 싸우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두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여기에 인류의 희망과 미래가 있습니다.P178-179지·승호: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교육은 무엇입니까?강·신 주었다:”철학적으로 말해서 좋은 교육”은 모순되는 표현입니다. 교육은 나쁜 짓입니다. 기성 세대인 억압 체제이고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니까요. 교육이 아이들을 가르친다”라는 뜻이라면 교육은 인문 주의자들이 목숨을 걸고 없애야 할 대상이죠. 교육이라는 말을 잃고, 오히려”성장”이란 말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성장을 돕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책과 교재는 다릅니다. 교재, 즉 교과서는 아이들을 졸게 합니다. 반면 그 교과서 밑에 몰래 숨기고 읽는 책은 아니죠. 선생님이나 부모가 읽는 교재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은 이렇게 다릅니다. 앞에서 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주인, 반대로 남의 권위에 밀려서 남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교재는 노예의 문자로 책은 주인의 문자였어요.)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라면,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에 들었어요.물론 그렇다고 아이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고, 노력 없이 주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만으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으니까요. 폭력 수단과 정치 수단을 독점한 만큼 국가는, 그리고 생산 수단을 독점한 채 국가의 비호를 받기 때문에 자본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직접·간접적으로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발견한 아이들은 이미 물 만난 물고기 같습니다. 그래서 나라나 자본이 땅에서 살기를 요구해도 그들은 가능하면 물을 떠나지 못하게 할걸요. 한편으로는 자신을 노예로 삼으려는 경향과 맞서서 싸우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두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여기에 인류의 희망과 미래가 있습니다.P178-179정말 긴 인용문입니다. 이렇게 긴 인용문을 쓴 이유는 내용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그리고 메루로·퐁티처럼 우리는 순진 무구와 폭력 사이에 중간을 뽑아야 한다는 솔직함이 인사이트를 줍니다. 남의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 인간적 고뇌가 오히려 우리의 생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는 그의 주장에 깊은 공감을 보냅니다. 그러니까 우리 위선을 버리고 남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소수자, 사상적 소수자 등과 마찬가지로 성적 소수자는 스스로 자신의 소수성을 인정하고 동시에 사회에서 인정하려고 합니다. 변 하사가 직접 성 전환 수술을 하고 여성 군인으로 군 생활을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군대 밖의 세계에선 성 전환 수술로 새 생활을 보내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변 하사는 자신의 인생을 당당하게 발언하려고 했습니다. 발언이 받아들여질 분위기가 됐다고 생각할 때 발언을 했습니다만, 아직 아니었거든요. 내가 성적 소수자임을 지금이라고 생각해서 말한 것에 공격 받는 것입니다. 말한다는 것은 그 얘기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정 받는 것입니다. ” 괜찮아”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나의 인생에서 우러나오는 수도 있고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도 있는데 그 앞에 당당하게 나를 인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P217최근 자살로 생을 마친 변·히스 하사의 말을 강·신 주는 철학자가 자신의 의지를 강조 부분인데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이야기는 ” 말한다는 것은 그 얘기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것입니다”라는 부분입니다.최근 새 여권의 젊은 대표가 정·장용의 지하철 시위를 놓고 매일 비판의 칼날을 세웠습니다. 저는 사실은 우리의 여당 대표라는 사람의 인격이 의심되었습니다. 강·신 주는 철학자는 자신의 책에 철학은 인생의 절실함이 있을 때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언은 한마디로 철학 부재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어 씁쓸한입니다. 우선 국민 앞에 사용하는 단어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언더 도그 마”나 “거대 담론”그리고”프레임”이라는 단어를 주저 없이 쓰면서 마치 나는 지식인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니까 이런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저와 토론할 자격이 없다고 선전 포고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공학자가 쓸 만한 단어를 차세대 한국의 지도자를 표방하는 자가 사용하는 단어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2번째로 강·신 주는 철학자가 말했듯이” 말해자가 약한 자”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강한 자는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그래서 말하는 자에게 좀 더 귀을 기울이고 주는 것이 지도자 할 일인데 그것조차 거부한다면 과연 지도자의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를 지지하는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자본주의”이나 ” 좋은 국가”을 떠드는 사람들이 사회 민주주의자나 강남 좌파이고, 자본주의”이나 “국가 기구 자체가 나쁘다고 보는 사람들이 정말 진보하거나 진정한 좌파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강남 좌파”을 그래서”청와대 좌파나 여의도 좌파”라고 불러도 좋겠네요.(웃음)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도 않는 국가라는 권력 독점의 형식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좋은 지주”,” 좋은 자본가 혹은” 좋은 대통령이나 국회 의원”라는 명분을 만들 수 있으니까. 소작농에게 관대한 지주,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주는 자본가, 국민에게 재분배를 제공하는 대통령과 국회 의원…… 그렇긴……. 이렇게 그들은 자신을 지지하고 달라며 자신에게 표를 달라고 합니다. 선택된 소수 지배자나 명령권자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습니다.”강남 좌파”,”청와대 좌파”혹은”여의도 좌파”의 본질은 “좌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강남”이나 “청와대”이나 “여의돕니다. 그들은 명령하는 소수 지배 계급, 무위도식도 부를 부를 수 있는 지주나 자본 계급의 자리를 욕망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그들이 표방한 “좌파 및 진보”은 제스처에 불과합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정치적 측면에서 모든 권력이 피지배자나 노동 계급에 갚을 생각은 애당초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강남 좌파라는 표현보다 “진보”라는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국민과 노동 계급을 사랑한다면서도 실은 그들이 정말 사랑한 것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보를 팔고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채우려고 했던 겁니다.강·준만 선생님 흉내를 내고 조어를 하나 만들어 봅시다. “강남 우파”입니다. 직접적으로 그들은 박·정희 군사 독재 권력에 대해서 있던 사람들입니다. 강남 우파의 기원은 사실은 친일파와 미 군정기의 친미파, 그리고 이승만 독재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벤 댐적 자아가 정착하기 전에 그들은 치미는 이기주의를 권력과 결탁하면서 분출한 사람들입니다. 행정 관료 사법 관료, 나아가서는 친정부적 지식인들이 바로 그들이에요. 1990년대 이후 군부 독재가 서서히 한국 역사에 사라지자 그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이기주의를 신자유 주의적 이념으로 정당화합니다. 강남 우파는 물적 생산 수단의 독점을 재산권의 논리로 정당화하고 그 독점한 자본을, 혹은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신자유 주의 시대에 자유란 결국 자본가와 지주의 자유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국가관은 매우 전통적입니다. 국가는 재산과 자유를 보호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들은 외칩니다. 누구도 자본가가 된다면 적은 돈이라도 잘 일하면 무위도식하면 공동체를 생각 없이 개인의 유리하나 손해를 따지며 살아가면 21세기 초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입니다. “강남”을 청와대를 “여의도”을 장악하려는 강남 좌파와 강남 우파의 각축장입니다. 신자유 주의로 무장한 강남 우파의 무기가 기만적인 “자유”개념에 집중한다면 강남 좌파는 노동 계급에 대한 애정,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표방합니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유권자는 강남 좌파에 표를 던지기 쉽습니다. 강남 좌파의 애정 공세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강남 좌파는 특히 사회적 약자 문제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대중이 감정 이입을 내다 이슈에 대해서는 감정적이라고 할 정도 개입합니다. 그래야 여론의 지지를 얻고 새 선거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강남 좌파는 여러모로 좋은 지주”를 닮았습니다. 좋은 지주는 소작농의 집을 찾아 그를 위로 말을 하고 쌀을 두고 가지만 결코 자신이 독점한 땅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P226-228강·신 주는 철학자는 이기적인 집단을 보수에 이타적 집단을 진보로 분류합니다. 그래서 한국 정당의 안에 진보는 거의 없다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강남 좌파, 강남의 우파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좋은 지주도 지주입니다. 나는 나름에 진보라고 생각했지만 주식에 투자해서 부동산에 투자하기를 즐기는 것을 보면 나도 진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강남 좌파에게는 진보에 불과한 것 같아요. 2011년에 한진 중공업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랐고 민주 노총의 김·진숙 지도 위원이 309일째 고공 농성을 실시했습니다. 그때 시인의 김·선우를 비롯한 많은 작가가 현장을 찾아왔다. 그것은 김·진숙에 혼자 간 게 아니라 해고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고 있었습니다. 해고된 근로자는 소수이면서도 다수입니다. 여기서 “소수 minority”는 Deleuz가 말하는 “권력 없는 다수”의 일입니다. 다수만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아 작은 목소리에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수의 목소리였습니다. 한편 정치가나 자본가들은 소수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가 언론에서는 다수의 목소리가 되어 버리네요. 묘한 상황입니다. P338-339권력 없는 다수가 소수에서 권력 있는 소수가 다수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병폐인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는 그 다수를 보지 않습니다. 다만 소리의 작은 소수만 취급됩니다. 먼저 말한 전·장용의 같은 단체를 소수에 몰아넣고 있는데 그래도 언더 도그 맥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 한국 장애자는 260만명으로 한국 국민의 5퍼센트에 해당하는 다수입니다. 그들이 권력 있는 소수는 두렵지 않은 것 같아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철학자의 임무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게 된 뿐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요. A라는 마을에서 B라는 마을에 가야 하는데 큰 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돌을 모두 돌아 갈 거예요. 그 돌만 치우면 되지만, 그 돌은 너무 커서 많은 사람이 대동 단결을 해야 갖지 않습니다. 철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면 거기에 앉아 계속 떠드는 것입니다. 이를 함께 해치웁시다, 해치웁시다,라고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내가 그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돌을 치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인문 주의자 민주 주의자는 명령을 내릴 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또 하나, 모든 사람이 나의 외침을 무시하고 나 혼자 두고 있어도 나는 돌의 한 곳에 머물 생각이에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젊었을 때는 “여보세요, 이것을 치우지 않으면”이라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조금 여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바위 근처에서 혼자 놀다가 사람이 오면”이 돌을 치우세요, 치우세요”라는 느낌이니까요. 그래도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조금씩 그 돌에 글을 새깁니다. 이 돌을 왜 치워야 하는지, 내가 죽으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읽고 또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돌을 치우세요. “함께 해치웁시다”라고.P345-346강·신 주는 철학자가 비유하는 철학자의 임무를 이처럼 잘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듣지 않아도 누군가가 꼭 해야 하는 것이여서를 외치며 그래도 안 되면 글에도 새겨졌다고 비유는 이 시대의 철학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처럼 보입니다.이 책은 강·신 주는 철학자가 철학자로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를 조금이라도 밝힌 책입니다. 그래서 철학이 어떻게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고 올바르게 이끄는 것인지 보이고 주는 사례라며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그의 책을 더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도 인생의 통찰력을 좀 더 넓히고 싶습니다.긴 문장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저의 팬이 되어주세요!! 팬이 되고 싶다면 위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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